[커리어 노트 78] 백지 공포를 이겨낸 숙련공의 힘

EK
4 min readJun 26, 2022
Photo by Daniel McCullough on Unsplash

※ 영감을 준 글 — “훈수는 잘 두는데 보고서는 못 만들어”…퇴직 임원들 재취업이 어려운 이유 [신수정의 일의 격]

​디자인을 하다 보면 내가 제안했던 오리지널 디자인이 없어지고 낯선 결과물로 남을 때가 있다. 때론 누더기가 되어 꼴 보기 싫어지는 경우도 있다. 내가 한 거라고 말하기 창피해서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한다. 그럴 땐 현타가 오면서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디자인하는 사원 한 명에 훈수쟁이 20명이라는 얘기를 하곤 했었다. 디자인을 내놓으면 시작되는 품평회. 온갖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동네북이 따로 없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맷집이 좋아야 한다). 종종 디자인 스펙 내 수정 기록(Revision History)에는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사연이 줄줄이다. 0월 0일 개발실장 지시, 0월 0일 부사장 지시, 0월 0일 VIP 지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과물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간혹 제품을 출시하고 디자인 기여자 명단에 들어가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디자이너가 있다. 변질이 된 결과물에 기여도가 작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해준다. 백지의 공포를 이기고 첫번째 선을 그었던 공로에 대한 인정이고, 몰매를 맞고도 살아남은 자에게 주는 상이니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백지에 선을 그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얼마나 많은 선을 지우고 다시 그렸는지… 보고서를 써 본 사람은 안다. 보고서 제목을 결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쓰고 고쳤을지… 어설퍼 보이는 그 선이 있으니 그걸 가지고 논의가 시작되는 것이다. 서툰 보고서라도 있어야 그거 기반으로 고치고 또 고치고를 하는 것이다.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내공과 배짱이 장기전 커리어를 가능하게 해주는 밑천이다.

​언젠가 아이디어 회의가 끝나고 수정안으로 2차 회의를 하자는 얘기가 오가던 중 예상치 못했던 답을 들었던 적이 있다. 외주업체에 전달하고 수정안을 다시 받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아니 7년 차 현역 디자이너가 이 정도를 직접 안 하고 외주업체를 쓴다고?’ ‘직접 그리면서 발견하는 경우의 수들과, 새로운 생각의 연결과, 스스로 논리를 확보하는 과정을 외주업체에 맞기고 외주 관리만 한다고?’ 나는 그제서야 아이디어 회의에서 보였던 사고의 부족, 아이디어의 부족, 논리의 부족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이 일하는 과장님이 혹은 부장님이 능력이 부족하고 배울 게 없다고 투덜대면서 정작 본인이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게 안 보인다는 게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다. 너무 빨리 관리직으로 빠지는 건 단연 경계해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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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K

Everyday learner, passionate for humans, curious for the world. Working at Google, connecting dots…